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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FA, 원양어업 진출 60주년 맞아 언론 미공개 사진 공개
등록일 : 2017/04/23 오후 4:34:59    조회 : 1741

60년 전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 지남호 출항 이모 저모


KOFA(한국원양산업협회)는 12일 원양어업 진출 6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 지남호의 출항 당일 출항식 사진 등 출항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들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대부분 그동안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진들로 향후 지남호 원형 모형 복원 등에 소중한 자료로 쓰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원양산업협회는 이들 사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첫 원양어업인 지남호 인도양 시험조업에 얽힌 뒷 이야기들도 소개했다.
이들 사진들은 지남호 선장으로 최근 금탑 산업훈장을 받았던 윤정구 선장과 이제호 어업지도관이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사진들이다.
한국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남호는 지난 1957년 6월 29일 부산항을 출항, 인도양으로 시험조업을 떠났다.
이날 해무청 및 중앙수산시험장 관계자와 경상남북도 일원 수산직 공무원들과 지남호 승선자, 제동산업(주)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선상에서 출항식 행사를 갖고 선원들을 격려했다.
원래 출항식 행사는 출항 사흘 전인 1957년 6월 26일 부산항 제1부두 해양경찰대 강당에서 당시 김 일환 상공부 장관, 홍 진기 해무청장, 이 한창 수산중앙회장, 안상한 중앙 수산 시험장장, 그리고 김 진만 국회상공 위원장 등 관계 요로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성대해 열렸었다.
그러나 출항 사흘전에 열린 기념식 사진은 지남호 승선자들이 간직하고 있지 않아 입수를 하지 못했고 출항 당일 열린 기념식 사진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국원양산업협회는 밝혔다.
아래 출항식 사진은 지남호 선내에서 열린 출항식 장면을 담고 있으며 양쪽에 놓인 태극기와 어선 가운데 있는 작은 목선이 눈길을 끈다.
지남호 시험조업은 당시 해무청 소속 중앙수산시험장과 제동산업(주)(대표 심상준)이 OEC(주한경제조정관실) 및 USOM(미국대외원조처)의 지원을 받아 민·관 합동 형식으로 이뤄졌다.
시험조사 사업이 이렇게 진행된 배경에는 사실 중앙수산시험장 이제호 지도관과 OEC(주한경제조정관실) 기술고문이었던 Mr.모간(Morgan)과의 각별한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이 지도관은 당시 OEC(주한경제조정관실) 기술고문 Mr.모간이 중앙수산시험장 건물을 같이 사무실로 쓰고 있었고 앞 뒤 사무실에서 서로 일을 하고 있어서 매일 인사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참치조업에 대한 숙련된 기술을 지녔던 Mr.모간이 한국의 원양어업 진출을 위한 참치연승 시험조업을 이 지도관에게 제안을 했고 상부 보고를 거쳐 국가적 사업으로 민·관이 힘을 합쳐 진행하게 되었다고 이 지도관은 회고했다.
지남호는 1946년 미 정부가 종합 시험 조업선으로 미국 오레곤주 아스토리아 항의 한 조선소에 발주해서 건조한 선박이다.
미국에서 운행할 당시 선명은 ‘SS Washington’ 호 이었다.
이 배는 그후 1949년3월에 미국 ECA 원조자금으로 한국 정부에서 구매를 하였다.
SS Washington 호는 원래 어군을 탐지할 때 쓰는 원통형의 탐방대가 어선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남호는 이 원통형 탐방대를 없애고 발판 형태만 남겨놓았었다.
이제호 지도관은 당시 어군 탐지에 이 발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지남호 출항 당일 부산항 제1부두에는 선원 가족들과 경상남북도 일원에서 찾아온 수산직 공무원들과 지역 주민들로 부둣가를 가득 메웠다.
당시 환송객들은 중앙수산시험장 지도선인 북한산호와 지리산호에 나눠타고 멀리 부산 오륙도 부근까지 나가 환송을 했다고 한다.



- 지남호 이야기 -

<1회> 원양어업의 위대한 첫 걸음, 지남호 이야기
인도양 참치연승 첫 시험조사선 지남호

우리나라 원양어업사의 첫 장을 연 지남호 윤정구 선장이 원양어업 진출 6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31일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우리나라 원양어선 선장 1호인 그는 우리나라 원양어업을 개척한 주인공이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을 쌓는데 일조를 한 그의 수훈은 다소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정말 반갑고 뜻깊은 일이다.
윤정구 선장이 받은 훈장은 단지 그 한 사람에게 주어진 훈장이라기보다 우리나라 60년 원양어업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하겠다.
원양어업이 1960-1970년대 외화 벌이를 통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윤정구 선장처럼 개척자 정신을 가진 수많은 원양선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남호 이야기는 황천 항해를 무릅쓰고 거침없이 나아간 수많은 원양선원들의 불굴의 의지와 그 도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원양어업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한 인도양 시험조사선 지남호는 원래 미국에서 건조된 선박이었다.
1946년 미국의 시애틀 수산시험장이 연구활동을 목적으로 당시 49만 달러를 들여서 강선으로 신조한 종합시험조사선으로 그 뒤 1949년 3월 당시 원조자금 32만6천 달러를 지불하고 우리나라에 도입했다.
2백30톤급에 6백마력짜리 디젤기관을 장착한 지남호는 원래는 건착어업을 할 수 있는 어선으로 건조되었으나 연승어업도 할 수 있게 설비가 되어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라고 할만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빙장 및 냉장이 가능하도록 냉장실은 물론 방향탐지기, 수심탐지기, 어군탐지기 등 각종 전자장비를 고루 탑재하고 있었다.

남쪽에서 부를 건져 오라는 의미로 지남호(指南號)로 명명

이 어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그쪽에서 부(富)를 건져 오라』는 뜻으로 선명을 지남호(指南號)로 명명했다고 한다.
도입 직후 이 어선은 연근해 시험조업에 이용되기도 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 한때 흰코끼리로 불리기도 했다.
인도 풍습에 흰코끼리를 받은 사람은 그 코끼리를 죽여서도 안되고 팔아서도 안 되며 늙어 죽을 때까지 먹여 살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닥친다는 미신이 있다. 인도양 시험조업 출어시까지 막대한 관리비만 잡아먹어 흰 코끼리처럼 골칫거리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고 한다.
지남호는 도입직후 정부(해무청)에서 관리를 하다가 그 후 1951년에 설립된 제동산업으로 소유권이 넘겨져 마침내 1957년 6월 29일 역사적인 인도양 참치잡이 시험조업에 나서게 된다.
당시 참치잡이 시험조업은 해무청 소속 중앙수산시험장과 제동산업(주)(대표 심상준)이 OEC(주한경제조정관실)와 USOM(미국대외원조처)의 지원을 받아 민·관 합동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제동산업은 OEC(주한경제조정관실) 기술고문 Mr.모간과 미 국무성 관리 윔스의 도움을 받아 사모아 통조림 제조업체인 밴 캠프(VAN CAMP)사에 참치를 잡아 공급키로 하고 민·관 합동으로 시험조업에 나섰다.
지남호 시험조업 단장은 남상규(작고) 해무청 어로과장이 맡았고 선장은 부산수산대학 어로학과를 졸업하고 수산중앙회 소속 어선(YMS200호)의 항해사로 조업한 경험이 있었던 제동산업(주) 소속 윤정구(90)이 맡게 되었다. 이밖에 중앙수산시험장(국립수산과학원 전신) 이제호 (89·지도관), 신관철(항해사·작고), 정진원(지도관보조·작고), 이정현(냉동사), 안승우(통역관) 등 공무원들과 OEC(주한경제조정관실) 소속 수산기술고문관 Mr.모간(Morgan), 그리고 일반 선원 등 모두 27명이 승선했다. 정부(중앙수산시험장) 공무원으로 승선한 이들은 모두 부산수산대학 출신이었다.

1957년 6월 26일 부산항 제1부두에서 지남호 출어식 성대히 거행

지남호의 역사적인 출어식은 1957년 6월 26일 부산항 제1부두에 자리잡은 해양경비대 강당에서 정부 인사와 수산단체장, 국회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실제 출항은 이보다 사흘 뒤인 6월 29일에 이뤄졌다.
당시는 6.25전쟁 끝이나고, 전쟁의 폐허더미에서 겨우 헤치고 나오던 때라 지남호의 출항은 건국 이래 보기 드문 경사였다. 어려운 시기에 해외 어장을 찾아 떠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은 당시 국민들에게 많은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었다.
이날 출어식에서 당시 지남호 선장이었던 윤정구 선장은 답사를 통해 『출어식에서 보낸 격려를 국가의 지상 명령으로 알고 기필코 시험조업에 성공하겠다』며 굳은 포부와 정열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국내 신문들은 지남호 출어 소식을 대부분 사진과 함께 4∼5단 크기로 비중있게 보도했다.
6월 29일 부산항을 출항한 지남호는 일본 시모노세끼항에 입항해 이곳에서 7월 10일까지 급유 및 보급과 수리를 완료하고 7월 11일 다시 출발해 7월 17일 당분간 기지로 사용키로 했던 대만 기륭항에 입항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7월 18일에는 대만 동쪽 해상에서 어법훈련과 어장탐색을 위한 첫 투망을 했으나 허탕만 쳤다. 우여곡절 끝에 지남호는 필리핀 근해와 싱가폴 근해로 조업지를 옮겨 시험조업에 나섰으나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기름마저 떨어져 오도가도 못한 채 한동안 싱가폴에 발이 묶였었다.
그러다 어렵사리 당시 싱가폴의 유일한 한국인 무역회사였던 한국무역진흥회사를 통해 2,500 달러를 빌려 기름을 채우고 선원들의 식량과 선수품을 보충한 뒤 8월 11일 다시 인도양을 향해 출발했다.

8.15 광복절 참치 첫 어획 성공(동경 94도 29분, 북위 7도 48분 지점)

그로부터 사흘 뒤인 8월 14일 마침내 인도양 니코발아일랜드 해역에 도착, 광복절인 8월 15일 오전 5시 우리나라 원양어업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참치연승어업의 실질적인 첫 투승을 시작했다.
동경 94도 29분, 북위 7도 48분. 지남호 선원들은 윤정구 선장의 지시에 따라 낚시를 던지기 시작했다.
가슴은 설레고 마음은 조급했지만 몸짓은 한없이 서툴렀다. 조업 경험이 없어 한동안 빈 낚시만 건져 올려야 했다.
그러다 얼마 안가 수면위로 참치의 거대한 어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공이었다.
「와!」하는 선원들의 함성 속에 진행된 이날 조업은 당시로서는 가히 성공적이었다. 어획량은 0.5톤으로 그리 많진 않았지만 순수한 우리 기술과 우리 선원들의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그 후 하루 0.5-1톤 안팍의 어획고를 올리며 계속 조업을 벌여 모두 10톤을 잡았다.
지남호가 부산에 돌아온 것은 부산을 떠난 지 108일만인 10월 4일이었으며 항해 및 조업일수 53일 중 실 조업기간은 15일 남짓이었다.
지남호의 인도양 출어소식은 당시 싱가폴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에 보도가 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지남호가 잡은 참치(실제는 새치)가 부산에서 비행기로 공수되어 서울 경무대로 옮겨져 이 대통령을 알현(?)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다.
지남호가 시험조업에 나설 당시 일본은 이미 태평양은 물론 대서양 인도양까지 대형 어선들을 대규모로 출어시켜 참치잡이에 나서고 있었다. 그 당시 전 세계 참치 생산량 40만톤 중 약 절반인 20만톤을 일본이 어획하고 있었으며 특히 태평양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점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지남호 시험조업이 성공을 거두고도 일본의 방해 공작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보도관제에 묶여 지남호 시험조업 성공 소식은 한참 뒤에 보도가 되기도 했다.



<2회> 바다는 또 하나의 영토, 그 위대한 출항
윤정구 선장과 이제호 지도관이 들려주는 지남호 이야기

지남호 시험조업은 당시 해무청 소속 중앙수산시험장과 제동산업(주)(대표 심상준)이 OEC(주한경제조정관실) 및 USOM(미국대외원조처)의 지원을 받아 민·관 합동 형식으로 이뤄졌다.
시험조사 사업이 이렇게 진행된 배경에는 사실 중앙수산시험장 이제호 지도관과 OEC(주한경제조정관실) 기술고문이었던 Mr.모간(Morgan)과의 각별한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 지도관은 당시 OEC(주한경제조정관실) 기술고문 Mr.모간이 중앙수산시험장 건물을 같이 사무실로 쓰고 있었고 앞 뒤 사무실에서 서로 일을 하고 있어서 매일 인사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참치조업에 대한 숙련된 기술을 지녔던 Mr.모간이 한국의 원양어업 진출을 위한 참치연승 시험조업을 이 지도관에게 제안을 했고 상부 보고를 거쳐 국가적 사업으로 민·관이 힘을 합쳐 진행하게 되었다고 이 지도관은 회고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조업할 어선조차 변변치 않을 만큼 수산업 기반이 취약했던 시절이었는데 참치 조업 경험이 있는 외국인 기술고문 도움만 믿고 민·관이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용기를 내어 해외 어장 개척에 나섰던 것이다.
지남호 출항 당일에는 나라의 명운을 걸고 미지의 대양을 향해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로 어장 개척에 나선 이들을 환송하기 위해 친인척과 지인들이 중앙수산시험장 소속 시험조사선 지리산호, 북한산호 등에 나눠 타고 부산항 오륙도 부근까지 따라 나와 환송하며 장도를 기원했었다고 한다.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일대 도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참치연승 첫 시험조업에 나섰던 윤정구 선장(전 오양수산 사장 역임)은 『세월이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참치가 처음 낚시에 걸려 수면위로 떠오르던 그날의 감격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처음 조업에 나갔을 때는 낚시를 바다에 드리우고 난 뒤에도 제대로 되었는지 자신이 없어 잠시 눈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어요.』
윤 선장은 자칫 시험조업이 실패라도 하면 모든 책임이 고스란히 선장인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 틀림없어 항상 조업기간 내내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책에서 배운 것 외에는 실제 참치연승 조업 경험이 없어서 낚시가 적당한 깊이로 들어가 있는지 낚시 놓은 방향은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미끼 끼는 방법은 틀리지 않았는지 걱정이 태산 같았죠.』
당초 지남호에는 선장 출신 외국인 기술고문관인 Mr.모간(Morgan)이 동승해 어구 사용 및 어로방법 등을 지도키로 했으나 모간은 인도양에 진출하기도 전에 대만 근해에서 첫 시험 투승(投繩)을 하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 곧바로 하선하고 말았다.
이제호 지도관에 따르면 Mr. 모간은 당시 부산항에서 지남호를 바로 타지는 않았고 지남호 출항 후 비행기로 이동해 대만 기륭항에서 합류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승선 후 첫 조업 지도를 시작하자 말자 다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참치연승 어법을 제대로 알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모간이 제대로 기술 전수를 해주지도 못한 상태에서 하선하고 말자 지남호 선원들은 몹시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빈손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남상규 단장과 윤정구 선장, 이제호 지도관은 선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한 끝에 일단 예정대로 인도양(적도 부근)으로 진출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기로 뜻을 모았다.
인도양으로 가려면 계정풍인 몬순을 뚫고 지나가야 했는데 당시 230톤급 지남호로서는 사실상 태풍의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을 각오한 항해였다.
이제호 지도관은 『남상규 단장과 제가 마침 제주 근해에서 상어연승어업을 해 본 경험이 있어서 참치연승 조업을 하는데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유류 및 선수품 공급과 어선 수리를 위해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들렸을 때 부산수대 후신 성격인 요시미수산대를 방문, 부산수대 일본인 동문들로부터 참치연승 어구어법 자료를 수집해갔던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시미수산대에서 수집한 어구어법 자료와 함께 배를 탈 때 가져 갔던 「원양수산」이라는 일본 수산전문지에 참치연승어업 어구어법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나와 있어서 이를 토대로 선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하며 조업에 활용했었다』고 밝혔다.
이제호 지도관은 『만약 기술고문관 모간이 다쳐 하선하고 난 뒤 열린 선상회의에서 부산항으로 철수키로 결정을 했다면 어쩜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싹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식수와 연료 부족으로 인해 비록 짧은 시험조업 기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선원들 모두가 하나 둘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축척할 수 있었다. 그때 쌓았던 어업 기술이 다음해 남태평양 본격 상업조업 진출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적도 부근인 인도양 니코발아일랜드 해역에 도착한 우리들은 공교롭게도 8월 15일 광복절 날 새벽에 드디어 참치잡이를 성공하게 됩니다.』
윤 선장은 『하루라도 더 조업을 많이 하기 위해 식수 사용을 양치질과 식수용으로만 제한하고 빨래는 물론 세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했으나 선원들은 아무 군말 없이 잘 따라 주었다』고 회고했다.
윤 선장과 선원들의 이같은 노력의 결실로 실제 조업기간 15일 남짓만에 모두 10톤의 어획고를 올릴 수 있었다. 전체 어획량의 80% 이상이 고가로 수출할 수 있는 참치였다. 어획물 대부분은 황다랑어였고 일부 눈다랑어와 새치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이제호 지도관은 『당시 지남호의 첫 시험조업 성공 소식은 단순히 한 회사의 성공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승리요 자랑거리였다』고 감격스러웠던 그때를 떠올렸다.
무엇보다 값비싼 참치를 잡아 당시에는 귀하디 귀했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국가 경제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남호 시험조업이 끝난 뒤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 어선이 해외에서 직접 잡은 참치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진상품으로 어획물을 부산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경무대로 보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실제로는 참치가 아닌 새치가 경무대로 보내졌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그 새치 앞에서 기념 촬영까지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보기 좋게 큰 놈을 고르다보니 사람 키보다 큰 새치를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호 지도관은 『그때는 참치라는 단어는 없었고 다랑어라는 용어가 있었지만 널리 통용되지 않아 주로 일본말로 󰡐마구로󰡑라고 하거나 튜나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새치도 당시는 튜나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 가장 큰 새치를 보내게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윤 선장은 『보통 인도양의 지남호 첫 시험조업을 원양어업 효시로 많이들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상업조업인 원양어업이 이뤄졌던 것은 그 다음해 남태평양 사모아에서였다』고 회고했다.
58년 1월 윤 선장은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부산항을 출항해 남태평양 사모아 근해에서 1년 3개월여 동안 조업을 했는데 첫 항차에서만 날개다랑어와 눈다랑어, 황다랑어 등 1백톤의 어획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 이후 제2지남호와 제3지남호가 차례 차례 조업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원양어업이 시작되었다.
지남호 윤정구 선장은 그후 한국 참치선단 단장으로 우리나라 참치 원양어선을 어로지도 감독하고 197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명태 연육 선상 가공선(공모선)을 이끌고 북양수역에 진출하는 등 한평생 원양어업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는 (주)동화 사모아 선단장과 고려원양(주) 부사장, 오양수산(주) 사장 등을 역임했었다.
부산수산대 어로학과를 졸업한 이제호 지도관 역시 1967년 북서태평양 원양 꽁치봉수망 시험조사 단장, 1971년에는 가다랑어 채낚기어업 어장조사 단장 등을 맡아 우리나라 원양어업 어장 개척에 앞장서 왔다. 1973년 공직 생활을 마친 그는 삼송산업(주) 상무를 거쳐, 고려원양(주) 이사, 서양수산(주) 대표이사, 광명수산(주)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는 등 평생 원양어업을 비롯, 수산업 발전에 헌신했었다.
지남호 시험조사단 남상규 단장을 비롯해 이들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떴으며 윤정구 선장, 이제호 지도관 등 살아 계시는 분들도 대부분 아흔 안팎의 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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