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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구 지남호 선장 인터뷰
등록일 : 2007/06/29 오전 10:38:14    조회 : 4952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참치연승 첫 시험조업에 나섰던 윤정구 당시 선장(전오양수산 사장 역임)은 『세월이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참치가 처음 낚시에 걸려 수면위로 떠오르던 그날의 감격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처음 조업에 나갔을 때는 낚시를 바다에 드리우고 난 뒤에도 제대로 되었는지 자신이 없어 잠시 눈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어요.』
윤 선장은 자칫 시험조업이 실패라도 하면 모든 책임이 고스란히 선장인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 틀림없어 항상 조업기간 내내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책에서 배운 것 외에는 실제 참치연승 조업 경험이 없어서 낚시가 적당한 깊이로 들어가 있는지 낚시 놓은 방향은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미끼 끼는 방법은 틀리지 않았는지 걱정이 태산 같았죠.』
당초 지남호에는 외국인 기술고문관인 Mr.모간이 동승해 어구 사용 및 어로방법 등을 지도키로 했으나 모간은 인도양에 진출하기도 전에 대만 근해에서 첫 시험 투승(投繩)을 하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 곧바로 하선하고 말았다.
참치연승 어법을 제대로 알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모간이 제대로 기술자문을 해주지도 못한 상태에서 하선하고 말자 지남호 선원들은 몹시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빈손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윤 선장은 선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한 끝에 일단 예정대로 인도양으로 진출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기로 뜻을 모았다.
다행히 해방되기 전에 대만에서 참치연승어선을 잠깐 탔던 적이 있는 한국인 선원 한명이 함께 승선한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윤 선장은 밝혔다.
인도양에서 시험조업을 하는 동안 윤 선장 일행이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미제 발전기와 연결된 일제 라인롤러의 잦은 고장과 어획한 생선을 어창에서 적당한 온도로 냉장 상태를 유지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선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그런 문제들을 모두 잘 극복해낼 수 있었다』고 윤 선장은 밝혔다.
『비록 짧은 시험조업 기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선원들 모두가 하나 둘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축척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쌓았던 어업 기술이 다음해 남태평양 본격 상업조업 진출의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윤 선장은 『하루라도 더 조업을 많이 하기 위해 식수 사용을 양치질과 식수용으로만 제한하고 빨래는 물론 세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제한했으나 선원들은 아무 군말 없이 잘 따라 주었다』고 회고했다.
윤 선장과 선원들의 이같은 노력의 결실로 실제 조업기간 15일 남짓만에 모두 10톤의 어획고를 올릴 수 있었다. 전체 어획량의 80% 이상이 고가로 수출할 수 있는 참치였다. 어획물 대부분은 황다랑어였고 일부 눈다랑어와 새치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지남호의 첫 시험조업 성공 소식은 단순히 일개 회사의 성공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승리요 자랑거리였습니다.』
무엇보다 값비싼 참치를 잡아 당시에는 귀하디 귀했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국가 경제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남호 시험조업이 끝난 뒤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 어선이 해외에서 직접 잡은 참치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진상품으로 어획물을 부산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경무대로 보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실제로는 참치가 아닌 새치가 경무대로 보내졌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참치인 줄 알고 기념 촬영까지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보기 좋게 큰 놈을 고르다보니 사람 키보다 큰 새치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참치라는 단어는 없었고 다랑어라는 용어가 있었지만 널리 통용되지 않아 주로 일본말로 1마구로‘라고 하거나 튜나라고 불렀어요. 새치도 넓은 의미로 튜나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 가장 큰 새치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지요.』
윤 선장은 『보통 인도양의 지남호 첫 시험조업을 원양어업 효시로 많이들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상업조업인 원양어업이 이뤄졌던 것은 그 다음해 남태평양 사모아에서였다』고 회고했다.
58년 1월 윤 선장은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부산항을 출항해 남태평양 사모아 근해에서 1년 3개월여 동안 조업을 했는데 첫 항차에서만 날개다랑어와 눈다랑어, 황다랑어 등 1백톤의 어획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 이후 제2지남호와 제3지남호가 차례 차례 조업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원양어업이 시작되었다고 윤 선장은 밝혔다.
원양어업 개척 5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 원양어업이 최근 200해리 경제수역체제 하에서 자원을 가진 연안국들의 조업규제 강화와 고유가 고임금에 시달리는 등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윤 선장은 『원양어업의 첫 장을 연 어업인으로서 정말 안타까움을 금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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